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펠리페 5세 (문단 편집) == 생활과 죽음 == 조부인 태양왕 [[루이 14세]] 시절처럼 펠리페 5세의 시대는 질서가 잡혀 있었다. 1730년 초부터 펠리페 5세는 궁정에다 다소 황당한 시간표를 강요했고, 이는 그의 치세 내내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왕은 아침 8시 무렵에 잠자리에 들었다가 정오에 일어나 가볍게 식사했다. 1시에는 옷을 차려입고 미사에 갔다가 그 뒤 방문객을 맞았고, 음악회나 연극을 할 시간이 되기 전까지는 창 밖을 보거나, 시계를 갖고 놀거나[* 지금에야 시계를 가지고 논 것이 우스울 수 있지만 당시 유럽의 시계는 엄청난 최첨단 과학기술로 지금으로 따지면 3D 프린트를 가지고 물건을 만들어내는 취미를 가진 것과 비슷하다.], 독서를 하며 저녁 시간을 보냈다. 자정이 넘어 보통 2시쯤 되면 대신들을 불러 오전 5시까지 업무를 처리한 후 창문을 닫은 채 저녁 식사를 했다. 그러나 펠리페 5세는 주기적으로 조울증에 시달렸다. 1727년 봄이 되었을때는 조울증을 심하게 앓았는데, 가끔은 무기력하고, 가끔은 열정적이고 격해졌으며 더 심하게는 [[의사]]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난동을 부렸다. 보다못한 이사벨 왕비가 그의 종교적인 헌신을 꾸짖으려 하자 펠리페 5세는 오히려 폭력적으로 반응했다. 그가 소리 지르고 노래 부르고 스스로를 깨무는 사이, 왕비는 왕에게 맞아 몸에 멍이 들었다. 환청에 시달리던 왕은 자신의 양쪽 발 크기가 서로 달라서 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머리카락이나 발톱을 자르거나 면도 하는걸 거부하였고 왕비와 신하들이 해라고 권해도 끝까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종이와 펜은 펠리페가 잡지 못하도록 치워져 있었는데 이는 왕이 충동적으로 퇴위할까봐 왕비와 대신들이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다를까 1728년 펠리페 5세는 펜과 종이를 쥐었고 카스티야 평의회 의장에게 자신의 퇴위를 선언하는 문서를 보냈으나 이사벨 파르네제가 때맞춰 발견하고는 이를 다시 회수하였다. 한동안 펠리페 5세는 어느 정도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고 8개월만에 처음으로 면도를 했다. 그러나 1732년 8월 무렵, 펠리페 5세는 일어나 식사하려 하지도 않았고 또 다시 외모에 무관심해졌다. 게다가 왕은 무려 19개월 동안이나 옷을 갈아입지도 않았다. 그는 대신들을 만나거나 문서에 서명하는 것도 거부했다. 1733년 부활절 무렵 정상을 되찾은 듯한 기미가 보였다. 둘째 아들인 왕세자 페르난도 왕세자는 부왕을 알현하여 그가 면도를 하고 옷(리넨)을 갈아입도록 설득해냈다. 그러나 페르난도의 영향력을 두려워한 이사벨 파르네제는 펠리페 5세를 설득해서 페르난도와 그의 아내인 세자비 바르바라가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거나 외국 외교관들을 접견하는 걸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게 했다. 이때문에 페르난도는 이사벨을 증오하나 어찌할수가 없어 속으로 화를 삭혀야 했다. 이사벨은 이제 자신의 수동적인 남편을 완전히 좌지우지하게 되었고, 그 다음해부터 왕이 음악이나 우울증을 덜어줄 수 있는 다른 오락에 흥미를 갖도록 하는 동시에 그녀 자신이 알려주고 싶은 정책만 남편이 알도록 했다.[* 여담이지만 여기서 이사벨 파르네제가 펠리페의 왕위 계승 당시 [[카를 6세]]편을 들어서 쫓겨난(마리아 안나 이 여자가 워낙에 장애인인 자기 남편에게 못된 짓을 많이 했지만) 자신의 이모이자 [[카를로스 2세]]의 부인인 팔츠-노이부르크의 마리아 안나를 남편의 동의 없이 입국시켰다.] 1738년 펠리페 5세의 정신적인 불안정이 재발하였다. 펠리페 5세는 소름끼칠 정도로 울부짖었고 주변 사람들이 그의 정신나간 짓을 목격하고는 이를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이 강구되었다. 결국 펠리페 5세는 1746년 7월 9일, 62세의 나이로 마드리드에서 사망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